무엇이 싸울 가치가 있는가? 기타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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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와우와 진 건담무쌍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와우야 예나 지금이나 명불허전인 게임인 관계로 아주 즐겁게 하고 있구요.

처음엔 판다리아의 종궈풍 분위기가 참 마음에 안들었는데, 이질적인 대륙을 무대삼아 제작진이 전달하고자 한 스토리부터가 지금까지의 와우와는 다른 독특한 전개를 선택하고 있었기에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왜 싸우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싸울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언뜻 보아서 같은 말을 돌려 말한 것 같지만 실은 크게 다릅니다. 전자가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묻고 있다면, 후자는 정 반대로 싸움을 선택한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상황이 강제된 싸움, 그리고 자유의지에 의한 싸움의 차이지요.

오크의 지도자, 나아가 호드의 대족장이 된 가로쉬 헬스크림은 이전의 보스들과는 달리 아제로스 행성 그 자체에 대한 압도적인 위협은 아니었습니다. 아웃랜드를 발판삼아 아제로스를 통채로 박살내려고 했던 불타는 군단이나, 사자의 군대를 일으켜 아제로스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스컬지, 아예 시작부터 아제로스를 박살내놓고 시작했던 대격변의 데스윙.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불타는 군단의 앞잡이가 되어 침공했던 오키시 호드는 아제로스라는 행성 자체를 위협한 두 번째의 적이었죠. 첫 번째라면 아퀴르들이겠구요. 심지어 티탄의 전령인 알갈론도 아제로스의 모든 생물체를 절멸시키고자 했고, 그 배후에 있는 고대신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싸움들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아제로스의 주민들에게 선택지는 없었지요. "왜 싸우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겠죠. "싸우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릴 뿐"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무엇이 싸울 가치가 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글쎄요. 이렇게 대답했겠죠. "싸우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릴 뿐이었으니까, 그런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노라고.

지금까지의 와우가 "안 싸우면 우리가 죽는다"라는 단순명쾌한 이유 아래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였다면, 판다리아의 대단원은 "생존의 문제가 아닌, 더 높은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라는 지금까지의 워크래프트와는 다른 기치를 내걸고 있습니다. 그 싸울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이번 확장팩의 최종 보스인 가로쉬 헬스크림입니다.

인종차별, 군국주의, 제국주의, 식민지 병참기지화, 비인도적 살상무기 사용, 비열한 음모. 인류가 거쳐온(또는 거치는 중인) 역사의 어두운 부분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워크래프트가 그런 측면을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분노의 관문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이번 확장팩은 폭군 가로쉬 헬스크림을 통해 이러한 인류사의 어두운 부분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크 우월주의에 의해 볼진의 검은창 부족은 오그리마에서 추방되며, 국가의 모든 기능은 얼라이언스와의 전쟁을 위해 뜯어고쳐집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판다리아에 상륙하여 이 곳을 식민지 병참기지로 삼으려고 하는데다가, 천상의 종과 이샤라즈의 심장을 이용해 학살을 꾸밉니다. 그야말로 히틀러의 재림이라고 할까요. 이 광기에 판다렌들은 고통받고, 결국 볼진은 "무엇이 호드인가", "무엇이 대족장인가"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고민 끝에 분연히 일어나 봉기를 일으킵니다. 가로쉬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얼라이언스를 끌어들여서요.

결국 얼라이언스와 볼진 휘하 반란군은 오그리마를 점령하고 가로쉬 헬스크림을 쓰러뜨리면서 그의 학정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여기서 현실의 정치, 현실의 전쟁이라면 호드는 소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소규모의 검은창 트롤 반란군만을 이끌던 볼진의 기반이 탄탄할 리가 없는데다가, 그에게 동조한 세력도 블러드 엘프/포세이큰 등의 호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소수세력 뿐이니까요. 거기에 비해 얼라이언스는 맹주 바리안 린이 스스로 정예부대를 이끌고 친정을 감행한 데다가, 와우 내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이자 달라란의 수장 제이나가 곁에 있습니다. 명백한 적성국의 정규군이, 국가의 수도를 장악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안이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자제할 인내심이 없었다면, 호드와 듀로타라는 국가는 그 자리에서 결딴나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바리안은 놀랍게도, 얼라이언스의 수장으로서 이와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마칩니다. 그리고, 호드에게 "명예를 잃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문합니다. 이 명예라는 개념은, 가로쉬가 벌였던 모든 것에 대해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 명예가 무엇이냐구요? 충분히 호드를 분쇄시켜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말입니다. 그 명예가 무엇인지 부연하지 않았지만, 바리안의 행동이야말로 그 명예의 표상이며, 그것을 눈앞에서 본 스랄과 볼진이야말로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다시 황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볼진은 그러는 대신 스스로 충성을 맹세했던 호드를 위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긴, 볼진은 잔달라 부족이 회유하는 데도 씨알도 안 먹힐만큼 뼛속까지 호드였죠. 마음만 먹으면 오그리마를 점거하고 호드를 찢어버릴 수 있었던 바리안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제지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판다리아의 안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테마를 전해준 영웅이며, 판다리아의 안개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더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만을 그렸던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처음으로 생존이 아닌, 그 ""과 "명예"로 은유되는 어떤 가치를 위한 싸움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습니다. 시네마틱 오프닝의 선문답(놀랍지만, 양놈들이 선문답을 만들었다구요!)은 이 제법 세련된 전개를 위해 깔아둔 밑밥이었습니다. 분위기나 게임의 재미를 떠나서, 와우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가진 확장팩이라고 평가하고 싶어집니다.


덧글

  • 아르티옴 2014/05/15 10:20 # 삭제 답글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부분의 와우저들이 신이 나도록 까대는 그 쭝궈풍 분위기도 뭔가 색다르고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했었는데, 이런 탄탄한 스토리까지 보여주니 판다리아는 저한테는 정말 대단한 확장팩이었죠.
  • 파라고나 2014/05/15 17:30 #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테마는 워크래프트에선 처음이었기에 굉장히 신선했어요.
  • NRPU 2016/07/28 12:52 # 답글

    하지만 일퀘지옥은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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